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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프랑스 동맹으로 본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
    국제관계학 2022. 12. 2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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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전쟁에 앞서 배경을 살펴보면, 먼저 프랑스 왕정의 반발심으로 프랑스 혁명(1789.5.5.~1799.11.9)이 발발하게 된다. 프랑스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하고 군대를 장악, 프랑스왕 루이 16세 체포하고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며 제정을 몰락시킨다. 프랑스는 공화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다른 유럽 국가들은 부정적이었다. 혁명의 불길을 차단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군대를 동원하여 프랑스 혁명을 제지하였고 17927월 프로이센이 프랑스 본토를 침공하여 전쟁이 시작된다. 프랑스 혁명군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을 발비전투(1792.9.20)에서 격파한다. 프랑스는 기세를 몰아 제1공화국(1792-1804)을 수립하고 루이16세를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로 처형한다(1793.1.21.). 이 사건으로 유럽 왕정국가들은 공포에 휩싸이며 프랑스에 대항할 국가들이 동맹을 맺는다.

     

      1차 대프랑스 동맹(1793~1797)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왕국, 영국 외 스페인, 포르투갈, 사르데냐, 네덜란드 등이 함께 조직하였다. 이 때 프랑스에는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여 이탈리아 밀라노 점령, 만토바 함락 및 수도인 빈까지 진격하였고 오스트리아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맺고 대프랑스 동맹에서 탈주하자 동맹이 와해되었고 1차 대프랑스 동맹이 깨지게 된다.

      대프랑스 동맹은 와해되었지만 프랑스는 계속 적대국으로 있던 영국을 공격한다. 영국의 본토와 식민지였던 인도의 연결을 막기 위해 이집트를 공격한다.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시작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1798~1801)은 성공한다. 영국은 식민지 연결이 끊기자 이집트와 프랑스를 잇는 바닷길을 차단시켜 나폴레옹을 이집트에서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이 때 유럽 왕정국가들은 또 다시 프랑스에 대항해 동맹을 맺는다.

     

      2차 대프랑스 동맹(1799~1801) 동맹국은 나폴레옹이 없는 사이 북이탈리아, 이오니아 제도, 코르푸 섬 등을 빼앗는다. 프랑스로 돌아간 나폴레옹은 영토를 되찾고자 하였으나 사령관 신분으로 모든 프랑스군을 이끄는 것이 불가했다. 나폴레옹은 브뤼메로 18일의 쿠데타(1799.11.9)를 일으키고 성공에 이른다. 나폴레옹은 1통령이 되어 최고 권력자에 오르고 군대를 장악하여 대프랑스 동맹군에 진격한다. 나폴레옹은 마랭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 격파에 성공하여 북이탈리아를 차지하게 되고 2차 대프랑스 동맹도 와해된다.

      이 때 영국은 2차 대프랑스 동맹이 깨지고 난 뒤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1 뒤 파기하고 프랑스 해상을 봉쇄한다. 이는 프랑스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영국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당시 나폴레옹이 최고 권력자였으나 나폴레옹파가 등장한다. 이에 통령에 한계를 느낀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율로 황제가 된다.

     

      3차 대프랑스 동맹(1805~1806)에 맞서 나폴레옹은 울름 전투(1805)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다. 그러나 다음날 프랑스군은 영국군과 격렬한 해전 끝에 트라팔가르해전(1805.10.21)에서 패한다. 패전 소식과 함께 러시아 군대가 밀려오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 병력을 흡수하여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황제 둘을 상대해야 했다. 3전투라고 한다. 나폴레옹의 뛰어난 전략으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의 한복판인 프라첸 고지를 점령하여 연합군을 양단시키고 남북 연합군을 차례로 격파하여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압도적 승리로 이끈다. 동맹국들은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3차 대프랑스 동맹은 와해된다.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자가 되어 독일지역에 '라인 동맹'이라는 속국을 세워 완충 지대를 마련한다. 라인동맹으로 서기 962~1806년까지 존재했던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된다. 라인동맹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그 중 많은 땅을 잃은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전투를 선포한다. 프로이센 왕국은 영국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4차 대프랑스 동맹을 조직한다.

     

      4차 대프랑스 동맹(1806~1807), 프로이센은 12만 대군으로 프랑스와 맞섰으나 프랑스가 프로이센의 페르디난트 왕자를 전사시키고 아우어슈테트 전투(1806.10.14)에서 나폴레옹 부하 다부 장군이 프로이센 왕을 상대로 승리했다. 나폴레옹은 180610월 말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한다. 이에 틸지트 조약(1807.7)으로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프랑스와 강화조약을 맺고 영국 참전도 흐지부지 되어 동맹을 해체한다.

      나폴레옹은 계속되는 대프랑스 동맹 형성을 막고자 핵심세력인 영국을 제거하기로 하고 대륙봉쇄령(1806~1811)을 실시한다. 대영국 무역 금지가 선포된다. 그러나 영국은 식민지를 통해 유럽과 교역하지 않아도 물자 조달을 할 수 있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에 무역을 의존했던 유럽 국가들이 피해를 입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은 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교역을 했다.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에 군사를 보내고 포르투갈 왕은 브라질로 도망간다. 스페인 역시 영국과 밀무역을 하자 군대를 파견했고 스페인 왕을 폐위하고 프랑스 왕인 자신의 형을 즉위시키자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프랑스는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스페인에는 식량이 없었고 스페인 저항군의 동시다발적 공격으로 프랑스는 패배한다. 기세를 몰아 포르투갈 민중도 반란을 일으켰고 영국군도 참전하여 포르투갈군과 연합하여 프랑스군을 몇 차례 격파한다. 결국 나폴레옹이 직접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 승리하지만 나폴레옹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저항세력과 영국군이 다시 저항활동을 하며 이베리아 반도는 애물단지가 된다. 나폴레옹이 차질을 빚는 것을 본 오스트리아 제국은 180949일 영국과 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전쟁을 준비한다.

     

      5차 대프랑스 동맹(1809), 4~7월 간 중유럽에서 전개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 교전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유럽 대륙 전쟁에 참전한 영국은 오스트리아군을 돕기 위해 왈헤렌 작전을 펼쳤으나 영향은 크지 않았다. 7월 초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5차 대프랑스 동맹은 전쟁에서 패전하며 해체된다.

    이후 러시아도 영국과 교역을 시작하고 나폴레옹은 1812~1813년 러시아 원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연이은 기상악화, 화재로 인한 식량부족으로 철수하기로 하고, 이때를 틈타 러시아군이 진격하여 베레지나 강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패배한다. 러시아군은 바르샤바 공국, 베를린까지 탈환한다. 프로이센을 비롯한 오스트리아, 영국, 포르투갈 왕국, 러시아 제국, 스페인, 스웨덴 등 유럽 대부분의 국가와 러시아가 동맹을 맺는데 6차 대프랑스 동맹이다.

     

      6차 대프랑스 동맹(1812~1814), 라이프치히 전투(1813.10.16.~10.19)에서 프랑스는 연합군에게 대패한다. 프랑스 자국 민심은 최악으로 치닫고 전쟁 능력에 한계에 다다랐고 연합군은 프랑스 파리까지 쳐들어왔다.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조약(1814.4.6.)으로 퇴위하면서 몰락한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근처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가며 나폴레옹 전쟁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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