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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정치 권위 : 형성, 변화, 그리고 전망중국·북한 2022. 12. 23. 22:40반응형
. 중국 공산당의 정치중국공산당의 정치권위의 형성, 변화, 그리고 전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본 자료는 중국공산당의 일당지배가 지속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선행연구와 연구질문을 던지고, 일당지배가 가능했던 중국 공산당의 정치권위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전망을 마무리로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공산당 일당지배에 관한 논문은 굉장히 많다. 그 논문들의 대부분이 중국공산당은 일당지배를 지속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논문 또한 위 질문에 비롯되어 쓰여졌다.
중국공산당의 일당지배체제에 대한 기존 선행연구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1. 공산당의 체제유지 능력에 초점을 두거나, 2. 공산당에 대한 인민들의 태도를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다.
전자는 공산당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수단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지 여부를 살핀다. 그러나 일당지배를 단순히 공산당의 통치능력에 의존하여 판단하는 것은 인민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한다.
후자는 이런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정당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일당지배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정치개혁과 경제발전 등과 같은 공산당의 통치능력을 여론조사나 불완전한 선거에 의존하여 평가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중국에서 일당지배체제의 발전방향을 전망하기 위해서는 공산당의 정치권위가 역사적으로 변화해 온 과정을 살펴본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헌법에 기초하여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려는 시도를 반대했다. 그는 인민이 헌법을 만드는 것인지, 헌법이 인민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모든 고체는 공기 속에서 녹아버린다는 공산당선언의 표현에서도 국가는 궁긍적으로 소멸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중국혁명의 이론적 기반이었던 마르크스 주의는 이처럼 토대를 부정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부정에 동의한 인민들이 혁명에 동참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물론 마르크스주의가 정당성의 근거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레닌의 역할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정치권위를 부정했지만 레닌은 달랐다. 그는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노동운동과 결합시킨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권력과 의지는 상위의 법칙인 이런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지배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산당 조직을 만든다.
레닌은 노동자계급의 의지가 혁명정신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함에 따라 정치권위를 공산당이라는 제도에 부여했다. 공산당은 노동자들을 안내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지식을 사용하여 노동자계급을 지도하여 그들의 정치권위가 강화될 수 있도록 한다.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을 지도하고 독재는 노동자계급이 실시토록 했다. 레닌은 (역사에서 상위의 법칙을 발견하여 정치권위를 부정했던 마르크스와 달리)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결합한 마르크스주의에서 정당성을 찾았다. 그리고 공산당은 정치권위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정치권력은 소비에트에서 행사하도록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이런 제도적인 배열은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뒤 공산당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면서 무의미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의존하여 공산당이 실시한 정책들이 관철되면서 정당화하는데 실패했다. 이는 결국 정치권위의 정당성 약화,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지 못한 소련의 해체를 불러왔다
중국은 혁명시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하여 새로운 국가건설의 토대를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중국의 사회주의혁명은 민족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치권위의 정당성을 확보했는데 노동자농민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에 적극 가담하며 민족공산주의에 지지와 동의를 표현했다. 이런 배경에는 민족공산주의가 자본가계급과 제국주의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마오쩌둥은 공산당이 주장하는 것은 일본침략자들을 완전히 물리친 이후 전국의 대다수 인민을 기반으로 하여 노동자 계급이 지도하는 통일전선의 새로운 민주연맹국가제도를 건설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는 사회주의중국의 정치권위가 의존할 수 있는 정당성의 근거가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당초 중국의 진보적 인사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중국사회는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해 혁명을 주도할 노동자들이 절대적으로 다수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노동자들만으로 조직화된 사회주의 운동은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중국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민족주의에서 해답을 구했다. 마오쩌둥, 천두슈 등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주도했던 이들은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중국에 마르크스주의를 적극적으로 확산한다. 그리고 이런 확산은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을 구하기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민족주의 입장에 기초한다.
중국노동단체가 자본가들의 자본주의에 반대해 투쟁하는 것이 곧 중국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며, 이런 투쟁만이 중국의 독립이라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또한 일본의 대아시아주의는 식민주의의 다른 이름으로 비판하면서, 아시아의 약소민족은 반드시 단결하여 대아시아주의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마르크스는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유주의, 무정부주의, 민주주의 등은 중국의 현재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론적으로 듣기 좋지만, 사실상 중국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위 법칙을 통해 새로운 정치체제를 건설할 수 있는 정치권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민족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대중동원에 성공한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중국이 들어선 이후 헌법의 제정을 통해 정치권위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공산당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지는 법과 제도가 초기의 혁명정신에 부합되는지 여부를 지속적으로 판단하여 자문을 하는 역할을 맡아 정치권위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반면 정치권력은 인민대표대회를 통해 설립된 정부에 의해 행사하도록 제도적인 배열을 모색했다.
그러나 혁명시기의 이런 기획은 공산당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공산당은 인민으로부터 권력이 유래한다는 혁명시기의 구호에 의존하면서 인민의 이름을 핑계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통해 정치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혁명은 비록 대중운동에 의존하여 새로운 시작의 토대를 닦았지만, 사회주의국가혁명 당시 사용했던 폭력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모든 것을 침묵시켰다. 특히 마오는 국가건설에 필요한 각종 명령과 정책들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기보다 헌법질서를 부정하면서 혁명시기에 획득한 정당성을 약화시켰다. 또한 민족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대중동원에 성공했지만, 마오쩌둥은 이를 자신의 카리스마로 대체하면서 공산당의 정당성은 근본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마오쩌둥의 이런 대중노선은 인민의 자발적인 동의에 토대를 이룬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민의 동의한 것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했을 뿐이었다. 즉 인민의 이름으로 지도자의 결단을 우선하고, 인민들의 참여로 만들어진 헌법을 무시한 마오쩌둥의 대중노선은 인민의 동의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이로인해 혁명시기에 인민의 이름으로 자행됐던 폭력은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도 인민의 이름으로 재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개인숭배가 인민의 동의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강변은 공산당은 물론 마오쩌둥 개인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할 수 없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권력과 권위를 구분하지 않았다. 정치권력은 단순히 직책에서 비롯된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위신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 마오쩌둥의 생각이었다. 그에게 정치권력은 정치권위와 전혀 구분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권위는 권력과 위신의 결합된 형태였다. 권력과 권위에 대한 이런 그의 생각은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당시 이 사상으로 자본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이들을 탄압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시기에 극단적인 개인숭배로 인해 취약해진 공산당의 정치권위를 복구할 필요가 있었다. 1980년 2월에 열린 11기 5중전회에서 "모든 인민과 당원들은 공산당의 위신을 회복하고, 높이며, 당의 지도를 강화하고, 개선하는데 주의력을 집중하여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한, "중국과 같이 큰 나라는 수억 인구의 사상과 역량을 통일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하며, 고도의 경각심과 규율, 자기희생적이며 인민대중을 대표하고 단결시킬 수 있는 당원들로 구성된 당이 없다면 어떤 일도 달성할 수 없다."며 공산당의 정치권위가 갖고 있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덩샤오핑은 전략적으로 정당성보다 정당화에 집중했다. 그는 공산당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당과 국가의 간부들에게 법과 제도적인 절차를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검찰과 사법기관을 강화해 반드시 법에 따르고,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고, 위법에 대해서는 반드시 조사토록 하였다.) 당시 개정된 헌법의 주요내용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부합하는 법률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는 경제성장을 우선하는 공산당의 정치적인 목표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인민들에게 경제적인 실익을 제공함으로써 정치권위를 정당화하려는 공산당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경제발전이라는 중심을 실현하기 위해 공산당의 일당지배가 지속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앙의 지도에 따라 적절한 경제성장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중앙이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제성장을 통한 인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은 공산당이 자신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경제성장의 성과는 인민들이 공산당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덩샤오핑의 권력을 이어받은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은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산당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는데 주력했다. 그들은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경제발전이라는 성과를 통해 공산당의 지시와 명령을 정당화했다. 특히 장쩌민은 공산당을 계급정당에서 집권정당으로 전환시키는 한편 자본가들의 입당을 허용했다.
또한 후진타오는 2007년 개인의 사적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물권법을 통과시켰다. 공산당이 계급정당에서 집권정당으로 정체성의 변화를 모색하고, 개인의 재산권을 법적으로 보호하려는 이런 노력은 경제발전의 성과를 자신의 명령과 정책을 정당화하기 수단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시진핑 역시 중국의 꿈이라는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뉴노멀이라는 중고속성장, 성장전략의 변환 등을 통해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이런 정당화와 함께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약화된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회주의중국의 토대를 형성했던 민족공산주의의 재구성과 법치에 대한 강조로 집약될 수 있다. (사회주의의 우선적인 과제로 생산성향상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이런 재구성의 일환이었다.)
사회주의 중국은 합법적인 절차가 부재한 상황에서 혁명이라는 대중운동을 통해 정치권위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는 헌법의 제정을 통해 인민의 동의가 구체적으로 행사되는 절차를 거치기도 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시기 중국공산당은 법보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마오쩌둥의 카리스마에 의지한 대중노선을 견지하면서 정치권위의 정당성은 약화됐다. 반면 덩샤오핑은 위기에 처한 공산당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법과 제도적 절차를 복원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개혁개방정책으로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자신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공산당은 앞으로 자신의 명령과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한편 법과 제도적인 절차를 보완하는 노력도 지속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갖고 있는 정치권위의 정당성에 대한 인민들의 근본적인 의문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공산당은 두 가지 측면에서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하나는 공산당이 혁명당시 자신의 정치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신념체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혁명당시의 민족공산주의로는 더 이상 인민들의 동의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공산당은 자신의 정치권위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약화된 사회주의의 신념을 보완 혹은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신념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신념체계에 대해 인민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주고, 이를 통해 인민들의 동의가 실질적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헌법질서의 보장이다. 인민들의 동의가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은 헌법이다. 사회주의 중국의 헌법은 광범위한 인민들의 참여로 인해 절차적인 측면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마오쩌둥시기에 부정됐던 헌법질서는 개혁개방정책의 시행과 함께 복원됐다. 특히 1982년의 수정헌법은 인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실질적인 동의절차를 거치기도 했다. 따라서 인민들의 동의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헌법질서를 준수하는 것은 정치권위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실효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공산당은 정치권위의 정당성 강화는 물론 인민들의 동의를 적극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인 절차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대응이 효과를 발휘하게 되면 중국공산당의 일당지배체제는 상당 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이런 노력이 실패하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일당지배체제의 변화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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